아직 앳된 티와 촌티가 줄줄 흐르던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여름날 늘 그렇듯이 갑자기 내린 비로 미쳐 우산을 준비못한 나는
하교길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다행이 비를 예상한 단짝친구가 챙겨 온 우산을 간신히 쓰는 시늉만 한 채
젖은 몸을 부딪히며 불편한 걸음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교문을 벗어나 큰길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앞서가는 형형색색의 우산들 사이로 빼꼼이 보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낡은 곤색 비닐 우비와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 온 커다란 짐자전거..
아버지였다...!
그 순간 왜 아버지가 전혀 반갑지 않았는지...
'에이...오늘은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는데...그러면 안만났을텐데...'
교실도 아니요, 교문 근처도 아닌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길가에서
날 기다린 이유를 알고 있기에......
늦게까지 자식을 둔 아버지는 아홉딸 중 막내인 내게
'늙은 아버지'였고, 가게일로 여름내 땡볕에서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은
곤색 비닐때문일까...더욱 초라해 보였다.
동시에 싸하게 죄를 짓는 아픈 마음이 엉켜 아주 어색하고 이상한 표정을 지소 있었나보다.
내 표정을 읽었던지 아버지의 얼굴도 굳어 있었고,
다 젖은 날 보시고도 우산을 건낼 생각을 못할 정도로 당혹스러워 하고 계셨다.
그 이상하고도 아찔할 정도로 혼이 나갔던 순간,
아주 잠깐 이었겠지만 말그대로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아버지...."
간신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자전거의 뒷자리에 꽁꽁 싸매 둔 우산을 풀어
아무말 없이 나에게 건내신다.
아버지가 건낸 그것을 보고...난 거의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 우산의 정체에 대해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딸들이 많은 우리집은 비가 오는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우산전쟁'이 벌어진다.
아무리 많은 우산이라도 그 많은 식구를 어찌 감당하랴...~
게다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검소함과 절약정신이 몸에 베인 터라-
우산같이 하찮은 것에 돈을 쓸 만큼 정신없진9?) 않으셨다.
쓸만한 것들은 아침 일찍 나서는 언니들의 차지였고,
그 나머지 것들을 우리 낮은 순번들이 나누어 차지하는 것인데
대개는 나도 그리 나쁘지 않은 상태의 우산을 쓰곤 했다.
그러나 누군가 제대로 우산을 챙겨 오지 않았거나....
(이런 일은 주로 일곱째 언니가 그러했다)...--하면
그 까만 것이 내 차지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눅눅한 곰팡내가 물씬 풍기고 희끄무레한 먼지가 쌓인 그 까만 우산.
꼭 박쥐날개 같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만큼 아버지가 정성을 쏟은 우산은 없다.
부러진 살은 흰 무명실로 꽁꽁 감아주고 살끝에서 빠져버린 천은 잡아당겨 다시 꼬매주고
마무리하는 똑딱이 끈을 대신해 노란 노끈으로 단단히 싸매왔던 것인데,
당신 성격대로 모든 물건을 수리하고 만드는 데는 모양보다도 무조건 다긴 손보지
않게끔 철저하게 '싸매고, 덧대고, 못박고' 라는 철칙을 지키신 것인 만큼
정성이 들어 간 물건인 것이다.
그치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모양은 영 어디 내놓을 만한 것이 못되었다.
우산을 건네 받고 울상이 됐던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냥 같이 쓰면 돼는데..."
내가 왜 딴전을 피는지 아버지도 알고 계실 것이다.
"둘이 쓰니 옷이 다 젖자너.."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우산을 받아들고 되도록 시간을 벌며 우산을 펴는데..
"타라."
"얘랑 같이 갈래.."
"타고 가라..."
완고하신 아버지다.
그럼에도 자꾸 지체하는 나를, 옆에서 보던 친구가 떠밀었고
나는 마지못해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 자전거 역시 남에게 보이기 민망한 것이었다.
그냥 얌전하게 사람이 탈만한 모양이 있는 자전거라 아닌,
주문하는 물건들을 이리저리 배달할 때 쓰는 크고 녹슨 것 인데다가
짐을 싣는 뒷자석은 넓은 나무판까지 대어 있어 아직 덜 자란 내가 타려면
다리를 있는 대로 좌악 벌려야 해서 그야말로
'폼' 안나는 자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쯤해서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버렸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친구한테 인사도 하는둥 한손으로 우산을,
한손으론 뒷자석의 손잡이를 꼬옥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패달을 밟았고, 속도를 내어 아이들 틈을 조심조심 비집고 달렸다.
자전거로 달리니 아는 얼굴들이 휙휙 지나 부끄럽던 마음도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넓은 등이 나를 덮고도 남았다.
그런데.....하필...
"때릉때릉~~"
아이들 큼을 피해 가기가 힘드셨던 아버지가 자전거 벨을 울리신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그 소리를 들었던지 뒤를 돌아보자
잔뜩 불만 섞인 내 눈과 딱 마주쳤다.
그 친구야 한 동네라서 알건 다 아는 사이였지만 주위 다른 친구들이 날 알아본다면
그야말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못본 채 해주기를..."
성격이 활발하고 시원한 그 친구는 그냥 지나쳐 주지 않는다.
"영은아..."
"................"
"좋겠다....먼저 가서 울 엄마한테 우산 좀 갖다 달라구해라~~"
여기서 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고
얼굴은 땡볕에 그을린 아기엉덩이처럼 달아 올랐다.
'욱~~나쁜 것...성격 좋은거 다 헛말이다...주책이지~~'
어느새 자전거는 하교길 동무들을 다 제치고 무리의 맨 앞을 달리고 있다.
'휴우,,,'
한숨을 쉬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 온 듯 하다.
좀전의 부끄러운 마음도 저만치 사라지고 내리는 비는 시원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등에서 뿜어 나오는 따스함이 비에 젖어 와들 떨리는 내 몸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그제서야...아버지 생각을 한다..
'무뚝뚝하고 무섭기만 하던 아버지가 나만을 위해 마중을 나오시다니...'
내 마음은 오직 아버지를 향한 애정과 감동으로 바뀌어 간다.
그 후로...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의 자전거가 기다려 졌다.
전처럼 부끄러울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날 같은 '마중'은 오지 않으셨다.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아버지가 계신 현충원에 들렀다.
출발 할 때 조금씩 내리던 비가 도착해서는 폭우로 돌변해
엄청나게 쏟아 졌다.
와이퍼가 연신 유리를 닦아 내었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내렸다.
차안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려볼까 망설이다가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좋아하시던
'소주'를 놓고 보니 마음이 급해 졌다.
마른 오징어와 종이컵을 비에 젖을 까봐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내렸다.
얼마 되지 않아 옷이 무거워 진다.
아버지의 묘비 앞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놓고 간 것인가?
아버지 묘비 앞 향나무 밑에 투명한 물방울 무늬 우산이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얌전히 비를 피해 서 있다.
아버지가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왔던 그날도 이때처럼 비가 많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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